테라 눌리우스

오스티나토 | 2010/01/26 21:35 | Mikolev

누군가에게 있어 몹시 춥고 꿀꿀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 생물종으로서 인간의 생애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범주는 거기서 거기다. 몇세대에 걸쳐 사람들은 피를 보며 서로 다른 얼굴이 되고 종종 진귀한 버섯을 먹고 울거나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아직도 서로 닮아있음을 상기시킨다. 내가 폼페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고대의 자세로 몸을 배배꼬면 지구 어딘가의 누군가는 그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내게는 분명 무언가가 없지만, 대신 쳐묵쳐묵할 삶은 콩이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르쳐질 수 없는 것들을 배우며 살아간다. 불완전하며 미혹스런 감각이여, 미적미적하고도 강렬한 마음이여, 편협무지하고 잔인한 생각이여,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이 사실상 예전 그대로 실컷 우려먹혀지는 인간성에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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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에 걸렸던 손가락은 이제 잘 나아서 샥샥 움직이는데, 쇼팽이 칸타빌레의 임무를 부여한 약지는 여태 슈만의 우울한 꼴을 하고 있다. 어느날 새벽에 깨어보니 나는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었고……완전 병신이 되지 않도록 피아노를 푹 쉬려하지만, '클라비코드를 치고 잇'라는 상상에서 정신을 차리고보면 이미 한 마리 짐승처럼 푸가를 쳐버린 후다. 어제 새벽엔 돌연 B급 공포영화에 나오는 인형처럼 눈을 반짝 뜨곤 너구리 라스칼 노래를 번안해서 불렀다. " 새하얀 클로버 꽃 피는 계절이 오면 자아, 함께 가자 라스칼♪ " 새벽이 문제다. 오늘 새벽엔 피아노를 참으려고 기른 손톱에 얼굴이 할퀴어짐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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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디어 지는 것과 예민해지는 것의 사이가 벌어질 수록 의미에 대한 수납력은 증가한다. 고딩 때 아무 생각없이 듣던 존 필드의 녹턴이, 더는 피아노를 치지 않으시는 우리 엄마가 연주하실 것만 같은 음악이었구나 싶어 눈을 감고 귀기울인다. 그 재미없는 하농조차 아름다운 노래로 만드셨던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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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아 식재 후 대략 4주가 지났지만, 아직 모든 싹이 올라오진 않았다. 2번째 싹이 막 났을 즈음 나는 고양이들이 프리지아 싹을 온통 뜯고 파헤치는 꿈에서 헐떡이며 깨어났는데, 다행히도 녀석들 눈에 그닥 먹는 풀로 안보이는지 현재까지 본잎을 키우고 있다. 식물들이 좋아한다더라는 브란덴부르크 콘체르토도 들썩들썩 틀어주며 나름 애정을 발산해보지만, 땅속에서 이미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녀석들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음지생물인 나는 종이를 바른 컴컴한 창문과 상성이 맞지만, 이 노란꽃님은 아니다. 햇빛 쬐어주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이것들을 샀을 무렵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여름날 공원에 피어있던 아이리스의 구근을 찾아내서 파올 생각까지 했었다.(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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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질 못하고 있다. 실수하는 게 두렵다. 다음 단계에서 망칠까봐 시작을 못한다니...(...) 취미가 생존에 관계되면 으례 취미로서의 즐거움을 상실한다. 수없이 내쫓으며 뛰쳐나가보지만 되돌아오고 만다. 속되고 기름진 것, 사람으로 하여금 달아나고 싶게 만드는 그 무언가. 거짓으로 기만하고 허영으로 차려입은 아집과 굴종을 뒤로한채 나는 이미 터져버린 고치 속으로 몸을 숨기려드는 어리석은 곤충처럼 텅 빈 내 껍질 속으로 계속해서 파들어간다. 어쨌든 새 일거리가 들어왔다. 또다시 나는 떠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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