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적 교리에 의하면, 동사 <살다>와 <꿈꾸다>는 엄밀하게 동의어이다.”
―호르헤 보르헤스―
세상이 좋아진다는 건 결국 삼킬 대지와 껴안아야할 한아름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어딜가나 미지근히 눕고 같은 밤을 보낸다, 사람의 행복은 착취해야할 무언가 임에 틀림없다. 노예의 성질을 시민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옛날에 그랬듯 지도 위를 지난 한줄의 통계거리가 되어도 그다운 현재를 바랄 뿐이다.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순하게 믿는 이들을 비웃지 않도록 주의를 듣고나면 나는 내가 읽는 종이뭉치를 누군가 빼앗아 들고 히히덕거리지 않도록 바지 가랑이 안으로 집어넣거나 화장실 변기에 틀어앉아 두루마리 휴지에 턱을 괴고 로댕이 깎은 모양을 한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연다면 그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원래 그래'라고 둘러대는 일종의 아이러니로, 지저분하고 더럽게 울고있는 아무것도 아닌 모방이다. (또는 곧 그렇게 되는)

나의 일기는 갈수록 한심해져서, 잉여의 모습을 띈다. 지금 내게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 '아무 생각'의 기준은 결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꽉 틀어막힌 뇌리 속엔 거의 모든 것이 지체된 상태로, 괘씸하게도 감히 늙고 있다. 아니, 아예 회로의 어딘가가 버뮤다 삼각지대나, 바이에른으로 향하는 아우토반 쯤에 비견되는 미혹스런 안개 속에 실종되어버린 것 마냥 끊겨있다. 라뇨를 생각한다. “공간은 나의 힘의 형식이고 시간은 나의 무력의 형식이다.” 내 공간은 실종되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볼품없는 것들이 밀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다. 아마, 예전의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나 결코 누군가에 의해 비평되거나 찬사되지 않겠다. 구경되지 않겠다,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다, 틀에 박힌 경력을 거부한다. 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살지도 않는다. 내게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를 해하지도 않은 채 발효되고픈 순진한 에고이스트로서의 야심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 바다로 침몰해야 한다. 나는 작곡가다, 나의 세계를 질료 삼아 꿈과 마법을 재창조해내야 한다. 흰고래를 찾아 회의의 바다를 항해하고 그와 운명을 함께 할 불구자다, 엄밀한 쾌락주의자로서 추구할 수 있는 건 결국 불행과 의지이다. 철저히 의도된 결핍으로 나는 걷겠다, 아름다움에게, 소외받는 소중함으로 다가가겠다.“ [2006년 10월 2일자 일기]
난 규칙을 어겼다. 현실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까마득히 어린 날의 꿈에서 깨고나면,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른다. 나는 배고프면 음악을 할 수 없으며 부양해야할 가족이 많다는 핑계로 빠듯해졌고, 내 생활과 태도를 타인에게 짜맞추었다. 그리고 이내 피곤해서 게을러졌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솔직해지는 게 좋겠다. 일부러 좋은 말 해주지도 말고, 싫으면 가운뎃 손가락을 세우며 "닥쳐"라고 응수하겠다 다짐한다. 애당초 긍정적인 태도에 재능이 없는 내가, 나 자신을 편집하기 위해 얼마나 끙끙대며 에너지를 소비했던가. “어버버버….” 이 허위에 찬 구닥다리를 끝장내버리자! 나는 곧 연말인 지금부터 이 다짐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오, 기다리다 지쳐. 오늘 나는 치즈가 뿌려진 찐득찐득한 오징어 스파게티를 맛나게 먹었다. 포만감에 젖은 나는 돼지처럼 꿀꿀거리다가 습관적으로 바흐를 두들겼고 새삼 진지하게, 음감 외엔 쓸만한 구석이 없는 내가 계속 음악을 해도 좋을지 생각에 빠졌다. 나는...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돈만 쓰고 벌고 똥만 만들며 살아도 될까?
내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이 내게는 더없이 형편없이 느껴진다. 순진한 라흐마니노프에겐 “당신은 매우 훌륭한 음악을 쓸 수 있습니다”같은 암시가 통할지 몰라도 이런 꼴통에겐 비아냥거림으로 간주된다. 남들이 뭐라그럴지언정 그것은 자괴감을 덜어줄 것이 못된다.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와 같은 마음일 수 있다는 건 의지가 박약하다는 건데,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자기혐오자가 자신에게 고결한 꿈을 품을 기회를 준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과, 현재 바라보고 있는 것을 관계시켜 이미지를 떠올리는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종이봉투에 오랬동안 들어 있던 사과들을 이제서야 집어 들었는데 그 중 여러개를
반쯤 잘라 던져버려야만 했다. 이후 나는 내 글에서 그 후반부 절반이 조악한 문장을
배껴 썼는데, 그것은 내게 마치 반쯤 썩은 사과처럼 보였다. ”」
- 나는 수거일에 맞춰 꺼낸 쓰레기 봉투를 볼 때 내가 꼭 그렇게 느껴진다.
떨쳐낼 수 없는 자기검열, 나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나는 병들었다. 애초에 불완전했다기보단, 병들어 있다고 믿는 이러한 성향은 분명 어딘지 종교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반쯤이라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불완전하다는 것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을 동정한다. '가련히' 여긴다. 사실 자신을 믿는다고 해서 해될 것은 많지 않다. 그것이 믿음이 아닌 허영이며 자존심에 기반한 허세이므로 너는 나로 인해 허약하다. 머리와 턱이 아팠다-일 때. 그것은 각각 다르게 아팠다.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턱이 아팠다거나 턱이 아파서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그들은 따로 아팠다. 그것이 아픈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고 고통의 정도도 달랐다. 동시에 고통받으면서도 그 아픔의 크기,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내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누가 어떻게, 얼마나, 언제부터 아팠는가도 구별이 안 되는데 그건 왜 그럴걸까…. 나는, 꿈꾸고 싶다. 내 공간을 찾아내어야만 한다.







